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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사건사고

518민주화운동

로이지기 2020. 6. 26. 14:08

사진은 본 글과 관련이없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부터 5월 27일 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계엄력 철폐들을 요구한 대한민국 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의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트페터 기자가 5.18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렸습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하다

사진은 본글과 관련이 없습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뒤 같은해에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군부를 장악하여 실권자로 떠올랐습니다 1980년대 초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게 되는데 언론을 조종 및 통제 하기 시작하여 전두환은 같은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 대한민국 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1980년 5월 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 등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을 발판으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한편 같은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 과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게 되었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5월 17일 24시경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하였습니다 .

 

5.18 사건초기 는 ?

 5월 15일 광주에서는 오루 4시에 대학생들이 3만여 명 정도가 도청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인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을 하는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는데요 그날짜와 시간은  5월 17일ㄹ 오후 9시 경입니다 

신군부는 5월 18일 오후 4시경 신속하고 ,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하여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하게 됩니다. 제7공수여단은 시위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행인들 에게 도 무차별폭력 을 가했다고합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을 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은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살상을 했다고 합니다 

 

19일 부터 시위 성격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동참하게 됩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계업군의 지압은 더욱더 가혹하게 변하였고, 공수부대는 학생 ,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렸을 가했습니다. 

 

계엄군의 발포 와 광주 시민 학살 ㅜㅜ.......

5월 21일오전에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 앞에는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있었고, 시민 대표는 21일 오전에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하지만 결렬되었습니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지만 공수부대는 철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계엄군은 수세에 몰려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 를 시작하였지만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도청 집단 발포 이후에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 수협,등에 올라가 조준사격을ㄹ 가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광주시내 110여개가 넘는 병원과 보건소 , 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21일 오후부터 집단 발포가 일어난뒤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 시민들은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으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결성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시민군은 260여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으로 외부로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습니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외곽으로 되각했고. 시민군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퇴각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게됩니다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22일 이후로 광주는 군인들게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드러냈으며, 군사정권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인해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약화시켰을뿐만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였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칠정도 라는 평가를 받고있으며,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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